추리 소설의 범인을 이미 알고 나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으면, 곳곳에 흩뿌려진 단서가 다 보여요. "아, 여기서부터 이미 티가 났네." 그런데 처음 읽을 땐 그 단서들이 수많은 문장 사이에 묻혀 하나도 눈에 안 들어왔어요.
달라진 건 이야기가 아니라, 내가 결말을 안다는 사실이에요. 결말을 알고 나면 지나온 길이 한 줄로 또렷하게 정리돼요. 마치 처음부터 그 길밖에 없었던 것처럼요.
시장에서 폭락이 지난 뒤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져요. 결말(폭락)을 알고 나면, 그 전의 신호들이 갑자기 선명해져요. 그리고 우리는 말해요. "이렇게 뻔한 걸, 그럴 줄 알았지." 이 뒤늦은 확신을 사후확신 편향(hindsight bias)이라고 불러요.
재밌는 건, 우리가 일부러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에요. 기억이 우리 몰래 손을 봐요.
어떤 일이 벌어지기 전, 우리 머릿속엔 여러 가능성이 뒤섞여 있었어요. "오를 수도, 내릴 수도, 그대로일 수도." 그런데 막상 결과가 나오면, 기억은 그 결과에 맞춰 과거를 다시 정리해요. 내렸던 결과가 나오면, "사실 난 내릴 것 같았어" 쪽의 생각만 또렷이 남기고, '오를 것 같았던' 마음은 슬그머니 지워요.
그래서 지나고 나면 나는 늘 '맞힌 사람'이 돼요. 실제로 그때 뭘 예상했든 상관없이요. 기억은 지난 일을 저장하는 서랍이 아니라, 지금의 결과에 맞춰 계속 다시 쓰는 이야기에 가까워요. 이 다시 쓰기가 조용히 벌어지기 때문에, 우리는 자기가 정말 알았다고 믿어요.